너른 들판에는 까마귀를 부리는 카라스노가, 강가를 낀 숲속에는 세이죠의 잎새가 나부끼고, 꺼지지 않는 불로 두드려 쌓은 다테의 철옹성은 견고한 데다, 드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흰 새들의 왕이 쉬는 호수가 있다는 시라토리자와까지- 네 세력이 부딪치는 격전지에 찾아든 두 무리는 고양이와 부엉이의 탈을 쓰고 무해한 척 굴었지만 과연 지나가는 길이기만 할까? 기존의 세력다툼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신진 세력의 등장에 일대의 눈과 귀가 모조리 쏠렸는데도 태연한 대장 고양이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슬슬 일하러 가보실까~ 헤이헤이헤이! 혼자만 날뛰면 섭하지! 부엉이의 눈을 따돌리고 너네만 재미 볼 생각일랑 말라고 눈을 부릅뜨는 친구에게 고양이 용병단을 대표해서 웃기지도 않는 까만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가 웃는 듯 눈을 가늘게 했다. 네네, 알아 모실 테니까 얼른 가면이나 쓰시죠~ 아차차! 내 가면! 좀전까지 당당하게 뽐내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허둥지둥 짐을 뒤지는 대장을 보다 못한 부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비켜 보세요. 마음만 급해 가지고 헛다리를 짚는 대장을 뒤로 한 부대장이 바로 가면을 찾아내자 부엉이 대장이 반색했다. 얼씨구... 신나서 부엉이 가면을 뒤집어쓰다 이번에는 앞뒤를 바꿔먹은 친구에게서 눈을 돌리자 얼굴을 감싸쥔 저쪽 부대장이 보였다. 토닥토닥 부대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대장 고양이가 우드득 소리가 나건 말건 가면을 휙 돌려 정위치로 맞췄다. 아, 아, 아파파!!! 엄살을 부리는 부엉이 대장의 덜미를 나꿔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부리나케 사라지는 두 인영 뒤에 남겨진 부엉이 부대장이 반안을 떴다. 군말없이 용건만 마치고 돌아오면 좋겠습니다만... 그럴리가 없겠죠. 안다.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빨리 왔으면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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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겠으면 보여줄게! 벌떡 일어난 오이카와가 푹 눌러쓴 후드를 걷어 올렸다. 당당하게 잘난 맨얼굴을 들이미는 오이카와의 머리 언저리에 척 보기에도 수상한 뿔이 한 쌍- 작은 시골마을의 사서는 질색했다. 당장 그거, 그 후드 도로 못 써요!? 목소리를 낮춰 무시무시하게 야단치는 엔노시타의 얼굴에 얼핏 스친 걱정하는 기색에, 오이카와는 시무룩하다 말고 배시시 웃었다. 역시 치카라쨩은 상냥하네에.
너무 밝아서 밤도 달아난다는 태양왕의 발치, 딱 일점만 어두웠다. 히나타가 뿌리는 햇살에 밀리고 밀려 한데 응축된 그림자의 정점, 카게야마는 사위에서 에워싸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광채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에 뿌득, 이를 악물었다. 도망갈 구석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은 히나타가 성큼 다가와 한껏 날을 세우고 움츠러든 카게야마의 경계를 침범했다. 빛과 뒤섞인 그림자의 세계는 혼란스럽고도 눈부셨다. 눈이 멀 지경이었다.
화상과 굳은살로 거친 손 마디마디에 약품이 튀고 데여 그 못지않은 제 손가락을 걸어 깍지를 낀 쿠니미가 후타쿠치가 풀지 못하게 단단히 힘주어 붙잡았다.
무려 단장을 제치고 이와이즈미와 나란히 휴가를 타낸 마츠카와는 본인들보다 더 수상쩍은 상상을 하는 단장일랑 무시하고 걸음을 빨리 했다. 남들이 마츠카와를 미심쩍게 바라보게 만드는 나른한 얼굴은 기실, 어서 이와이즈미를 껴안고 휴가 내내 늘어지게 잘 생각밖에 없었다.
매사에 졸려 보이는 얼굴로 묵묵히 일하는 서기관의 눈동자가 이따금 기사단장이 도서관을 찾을 때면 남몰래 빛난다거나, 항상 성실한 서기관이지만 기사단 업무일지를 필사할 때면 한결 공들여 찬찬히 베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자그마한 비밀이었다.
가지 마. 낙향하는 일개 신관의 발걸음을 몸소 붙잡으려 뛰어온 기사단장은 주저 없이 스가와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이치! 비난하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에도 물러나긴커녕 되려 고개까지 숙이는 기사단장의 기세가 엄정하고, 어쩔 수 없이 씁쓸했다. 난... 기사단을 떠날 수 없어. 그래서, 이기적인 부탁인 거 알지만, 여기 있어 줘. 스가. 내려가지 말고... 수도에만, 내 손 닿는 데만 있어, 응? 부탁이야. 다른 건 안 바랄게. 네가 뭘 하든 네 자유니까, 내가 널 지킬 수 있게만 해줘... 스가와라가 이를 악물었다. 지나가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있다 뿐이지 어떤 강제력도 없는 사와무라의 호소에 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신관복의 펑퍼짐한 소맷자락 뒤에서, 스가와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소년왕에게 원성이 드높을 때 겁없이, 그래 그날의 일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내전의 문을 두드린 해사한 얼굴의 신관은 감히 왕의 안전에서 등을 곧게 펴고 일갈했더랬다. 신의 말씀을 풀어 전하듯, 어린아이를 달래듯, 보통이 아닌 자신의 잣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불가해한 눈으로 보던 왕에게 차근차근 '보통'의 기준을 가르치는 신관의 등 뒤에 후광이 보이는 기분이었다고, 당시 내전에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대신들은 회상하곤 한다. 중책을 맡은 그들조차도 감투를 벗어던질까 고민하던 시기에, 제때에 찾아온 스가와라의 등장은 신의 사도의 강림이나 마찬가지였다. 감격한 대신들이 입을 모아 천거한 대로 왕사의 자리에 오른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인간성을 불어넣었다. 소년왕에겐 너무 버거운 왕관을 잠시 내려두고 일개인으로서 마주하는 잠깐의 시간에 점점 더 제게 빠져드는 카게야마를, 무감한 눈동자가 절 비추면 눈 녹듯이 사르르 녹는 광경을, 스가와라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신관의 몸으로 빠지면 안 되는 길임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신이 된다는 달콤한 배덕감에 젖은 스가와라는 저를 올려다보는 카게야마에게 모질지 못했다.
무려 단장으로부터 기사가 아닌 레이디 취급을 받는 게 짜증스러울 만도 하건만, 보기보다 능청맞은 마츠카와는 태연하게, 가성도 안 쓰고 교묘하고 우아한 레이디식 화법에 있지도 않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시늉까지 하며 받아쳤다. 흠 잡을 데 없는 명연기에 단장, 오이카와의 얼굴에 더 짙은 웃음꽃이 피었다. ...아무리 흥이 올랐어도 그렇지, 진짜 사교계에 저를 파트너로 동반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마츠카와가 어깨만 으쓱했다. 저 멀리 보이는 이와이즈미에게 은밀하고 다급하게 신호를 보내는 걸 잊지 않고, 오이카와를 피해 슬금슬금 멀어지는 마츠카와의 얼굴에는 영광스럽다거나 감격은커녕 귀찮아 하는 기색만 가득했다.
부엉이가 우는 밤에, 아카아시는 외딴 호수에 홀로 내려앉은 백조의 왕과 호반에 내린 달의 밀회를 목격했다. 꾸르르, 거꾸로 돌린 시야에 비쳤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의외로 기억에 남아서, 아카아시는 늘어지게 자기도 바쁜 한낮에 빼끔 눈을 뜨고 백조 무리를, 호수 한가운데서 무결한 날갯죽지를 퍼덕이는 우시지마를 훔쳐보게 되었다. 수면부족으로 꾸벅거리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우시지마에게 있었다. 달이 드높다 한들 우시지마를 밤이고 낮이고 지켜볼 수 있는 저 스스로에게 아무런 불만도 욕심도 없는 아카아시가 다만 관찰만 계속했다. 흰 새의 왕관이 눈부셨다.